언젠가 음식 전문가들이 모여 순대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한 전문가는 순대가 중국의 삼국시대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문가는 6세기경 중국의 < 제민요술 > 에 양의 내장을 이용한 '양반장도'라는 음식이 등장한 것을 증거로 내세웠다. 당시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해왔던 우리나라에도 순대가 전해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다른 전문가는 몽고 전래설을 주장했다. 고려시대 원나라 몽고군이 전투식량으로 사용했던 '게데스(돼지창자에 쌀과 채소를 섞어 넣고 말린 전투식량)'라는 요리가 국내에 전파되어 오늘날의 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설이기 때문에 두 의견 중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 음식디미방 > , < 주방문 > , < 증보살림경제 > 등에 개의 내장을 이용한 개장, 소를 이용한 우장증 등 순대의 기원이 되는 음식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국내에 그 이전부터 순대 형태를 띤 음식이 있었음은 확실한 사실이다.
순대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다. 하지만 이번에 소개할 음식은 요즘 우리가 흔히 먹는 순대가 아닌 순대의 전파 경로를 엿볼 수 있는 원초적인 순대다. 과연 그런 순대가 국내에 있을까?
가리봉동에 가면 중국인 동포들이 모여 상권을 이룬 동포타운이 있다. 이곳에는 연변을 포함한 중국 동북삼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진하게 풍기는 이국의 향신료 냄새가 마치 중국 본토를 연상케 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좌판에 깔아놓고 파는 길거리 음식이 눈길을 끈다.
각종 만두와 중국식 빵은 물론 꼬치구이 그리고 삶은 고기를 통째로 내다놓고 파는데, 심지어 돼지 심장을 통째로 놓고 판매하는 모습은 사뭇 이색적이다. 길을 걷다 어느 순간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나면 이는 백발백중 초두부집 앞을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다. 초두부를 먹을 수 있는 곳은 서울 시내를 통틀어 아마 이곳뿐일 게다. 순대, 그것도 머리가 쭈뼛할 정도로 환상적인 순대를 발견한 곳은 바로 이곳, 동포타운이다. 음식 전문 기자 시절, '팔도순대'라는 기획기사를 쓰기 위해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순대는 모두 섭렵한 경험이 있어 순대 하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 후 우연히 맛본 이곳 순대는 그야말로 진귀한 경험이자 놀라운 발견이었다.
국내에는 현재 다양한 형태의 순대가 있다.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천안의 병천순대는 채소로만 속을 채운 것이 특징이다. 비슷한 형태로 두부와 숙주, 콩나물 등으로 속을 채운 용인의 백암순대도 병천순대 인기 못지않다. 이와 같이 국내 대부분의 순대가 돼지창자에 각종 재료를 채워 만드는 것이라면 돼지창자가 아닌 다른 재료를 사용하는 순대도 있다. 실향민들의 손에 의해 탄생한 속초의 오징어순대, 명태 속에 쌀과 간을 한 명태알을 채운 명태순대는 해산물을 사용한 순대로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가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제주도에 가면 막창을 이용한 막창순대가 유명하다. 이는 돼지의 항문 부위에서 20㎝ 정도만 연결되어 있는 막창을 사용해 그 맛이 특별하다. 최근에는 < 시의전서 > 에 등장했다 명맥이 끊긴 '어교순대'(민어 부레에 속을 채운 순대)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동포타운에서 발견한 순대는 돼지의 소창, 돼지 피 그리고 찹쌀, 이렇게 세 가지만으로 만들어진다. 물론 집집마다 약간의 향신료와 소량의 채소를 비법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오리지널을 고집하는 집에서는 이 세 가지만을 사용한다. 속을 채운 순대는 물에 삶지 않고 찜통에서 쪄낸다. (대부분의 한국식 순대는 물에 삶아 건조시키는 형태다.)
이렇게 완성된 순대는 양끝을 묶어 돌돌 말아 파는데 그 형태가 마치 유럽의 소시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한 프랑스인 셰프에게 이 순대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프랑스 북쪽에 돼지의 창자와 피로만 만든 이와 비슷한 맛과 형태를 가진 소시지가 있으며 이를
부댕(boudin)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순대의 맛은 깊고 은은하다. 맛깔난 갖가지 재료로 속을 꽉꽉 채운 순대에 입맛이 길들여진 이들에겐 이 맛이 심심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돼지창자와 신선한 피의 맛을 그대로 살려낸 맛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순대에 태초의 맛이 있다면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
위치: 가리봉시장입구에서 20m 안 왼쪽
메뉴: 순대 1근 5천원, 만두·월병 각 3천원, 볶음요리 7천~13천원
TIP 해홍면식점 100배 즐기기
● 순대 외에도 동북삼성 음식에 도전해보자. 메뉴판은 모두 중국어로 적혀 있지만 주인에게 물어보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 포장도 가능하다. 집에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 최대한 맛을 복원할 수 있다. 기호에 따라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프라이를 해도 좋다. 중국 동북삼성에서는 이런 식으로 순대를 먹기도 한다.
● 식당에서 순대를 만드는 시간을 미리 알아두자. 방금 쪄낸 뜨끈뜨끈한 순대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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